상해는 태가촌에서의 식사를 끝으로 관광을 마치고 소주를 향해 출발하였다. 상해에서 소주로 가는 길은 끝없이 펼쳐진 평야로 고속도로를 두시간 여를 달려도 평야다. 22:30시에 소주에 도착하여 古城花圓酒店에 여장을 풀었다.
다음 날 아침(060522) 일찍 일어나서 식사를 마치고 버스로 한산사로 갔다. 소주는 강소성의 성도로 인구는 572만 명이고 시내에 100만 명이 살고 있으며 특산물은 실크라고 한다. 예로부터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 항주가 있다.”는 말이 전해 올 만큼 살기가 좋은 고장이라고 한다. 또한 과거에 급제한 선비가 많이 난 고장으로 소주 지방의 집을 보면 검은 지붕에 흰 벽으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그것은 검은 지붕은 먹을 의미하고 흰 벽은 종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선비의 고장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소주를 동방의 베니스라고도 칭하는데 그것은 경항대운하가 건설되면서 수로가 크게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경항대운하는 북경(北京)에서 시작하여 소주 서쪽의 양주(揚州)를 거쳐 항주(杭州)까지 총 2,000㎞에 이른다. 남북 대운하의 개통으로 海河, 黃河, 淮河, 長江, 錢塘江등 중국의 5대 수계(水系)를 연결하여 남북 간의 경제, 문화교류를 촉진하였다. 수양제때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필요한 물자와 병력을 수송하고 황제의 남부 시찰 때 호화 유람선을 이용하기 위해 건립하였다고 한다. 수양제는 무리한 대운하 건설과 고구려 전쟁에서의 패전으로 왕조가 몰락하였으나, 남북의 교통 및 운수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와서 본격적인 중국 발전의 기초가 되기도 하였다. 수양버들이라는 명칭이 수양제가 경항대운하에 호화 유람선을 띄우고 유람을 하면서 강가의 버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나무 이름을 물으니 버들이라고 하니 “저렇게 아름다운 나무가 버들이 무엇이냐”고 하면서 “이제부터 나의 이름을 따서 수양버들이라고 하라.”고 명하여 수양버들이 되었다고 한다.
한산사는 시내 한 복판에 자리 잡은 절인데 오밀조밀하게 아주 잘 꾸며져 있었다. 남조시대에 지어진 한산사의 원래 명칭은 묘보명탑원(妙普明塔院)이었으나 당대 고승인 한산자(寒山子)가 이곳에서 머문 후에 그의 이름을 따 한산사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대웅전은 높이가 12.5m이며, 뒤편에 유명한 종이 있는데, 높이가 2m이고 직경이 1.4m이다. 당대의 청동 유두종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인이 광서(光緖) 32년에 바쳤다고 한다. 한산사는 당나라의 시인 장계(張繼)의 “楓橋夜泊”이라는 시로도 유명하다. 장계는 노를 저어 마을로 돌아가던 한 밤중에 풍교에 배를 정박해 두고 있는데 그 때 마침 한산사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시를 지었다고 한다.
한산사 관광을 마치고 한약방을 방문하였는데 파스와 무좀약을 파는 곳으로 마침 다리를 다친 로사가 파스를 많이 붙일 수 있어서 고마웠다.
그리고 개인정원으로 꾸몄다는 留圓을 방문하였다. 유원은 송대의 창랑정, 원대의 사자림, 명대의 졸정원과 함께 중국 4대정원의 하나라고 한다. 이 정원은 아기자기한 정교함이 돋보이는 남방 고전원림건축예술의 정화라는 칭송을 받는 곳이다. 유원은 1525년 명(明)대 가정(嘉靖)년간에 건립되었는데 원래는 명대 한 관리의 사원(私園)이었다가 청(淸)대 관리 유소(劉恕)의 소유로 넘어가면서 한벽산장으로 개명하였다가 점차 유원(劉園)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1953년 정부가 보수하여 1961년에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의 하나로 지정되었고 1988년 세계문화유적으로 지정되었으며 지금은 국가에서 경영하는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어서 호구산을 관광하였는데 다리가 아픈 로사는 포기하고 혼자서 갔다. 이름만 산이지 사실은 산이 아니고 무덤이라고 한다.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왕 부차가 그의 아버지 합려의 묘역으로 조성한 것이라는데 높이가 해발 34m의 커다란 동산이었다. 호구(虎丘)라는 이름은 후에 진 나라의 진시황이 합려의 시신과 함께 매장되었다는 명검을 찾기 위하여 이 무덤을 파헤치려고 하였는데 그 때 호랑이 한 마리기 지키고 있어 포기하였다고 하여 이때부터 호구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호구산 입구에 들어서니 길 오른 쪽에 오왕 합려가 명검을 시험하기 위하여 잘랐다는 작은 바위가 두 쪽으로 갈라진 채 눈길을 끈다. 조금 더 올라가니 넓은 바위가 펼쳐져 있고 그 아래로는 작은 연못이 예쁘다.
이 바위는 워낙 넓어서 천여 명의 승려가 설법을 들었다 하여 천인석(千人石)이라고 한다는데 조금 더 오르니 오왕 합려의 시신과 함께 삼천 개의 검이 묻혔다는 검지가 나왔다. 그런데 그 검지 위에 걸친 돌다리 위에는 두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그 구멍은 중국의 역사상 4대 미인에 드는 서시가 검지를 내려다보던 곳이라고 한다.
범려의 미인계로 보내진 서시는 오왕 부차의 애첩으로 사랑을 받으며 살았다. 그런데 그녀는 검지의 아름다운 모습을 날마다 다리 난간에서 내려다보곤 하였는데 이것을 본 오왕 부차가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다리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주었다고 한다. 구멍이 두개인 것은 왕 자신도 서시와 같이 보기 위하여 구멍을 한개 더 뚫었기 때문이란다. 산이 아닌 34m 높이의 언덕 위에는 높이 47,5m의 운암사(雲岩寺) 탑이 우뚝 서 있다. 8각 7층 벽돌 탑인데 약 15도 정도 기울어져 있어서 중국판 피사의 사탑으로 불린다고 한다. 다리가 아픈 아내가 차로 오기 때문에 부지런히 버스로 가니 편히 쉬고 있었다. 다녀오고 보니 아내도 조금만 내가 무리하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작은 산인데 아쉬움이 남는다.
호구탑 관광에 이어서 실크의 원산지로 유명한 소주에 와서 실크 쇼핑을 하였다. 안내에 따라 매장으로 가니 입구에 뽕잎을 먹는 누에 바구니가 눈길을 붙잡는다. 하얀 누에들이 부지런히 뽕잎을 갉아먹는 모습이 분주하다. 또한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는 여공의 손놀림도 바쁘다. 실크 이불솜을 만드는 과정을 견학하고 판매장을 둘러본 다음 그 옆방의 비단 패션 판매장으로 가서 실크 검정색 셔츠를 구입하였다.
그리고 바로 발 마사지하는 곳으로 이동하여 마사지를 받았다. 개인적으로 즐기는 것은 아니지만 옵션에 포함된 것이었다. 일행은 15:00시에 전용 버스로 항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