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있던 화양서원은 노론의 영수
송시열을 제향한 서원으로 1999년 12월 29일 사적 제417호로 지정
되었다. 화양서원은 송시열이 은거하던 장소에 세운 서원으로 1696년
(숙종 22) 사액을 받았다. 조선시대 학자들의 결집장소였으나, 고종
때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 만동묘는 중국 명나라 황제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1704년(숙종 30)에 지은 사당이다.
조선 후기의 여러 서원중에 가장 폐단이 큰 것이 이 화양서원이었다.
임진왜란 때 구원군을 보낸 명나라 신종을 제사하는 만동묘가 있다는
이유로 화양동 서원은 지방관은 물론 국왕보다도 위에 있었다. 명나라
신종은 환관들을 전국 각지에 보내 광세, 상세라는 명목으로 마구잡이로
은을 수탈함으로써 악명 높은 황제이지만 조선의 서인(노론)들에게는
나라를 다시 살려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의 황제였다.
당시 서원중에서도 가장 횡포가 심해 제멋대로 발행하는 화양묵패
(華陽墨牌) 때문에 폐해가 컸다. 묵패란, “서원에 제수전이 필요하니 아무
날 아무 시간까지 얼마를 봉납하라.”는 식의 고지서에 묵인을 찍어 군 ·현
으로 발송하는 것이지만, 이 묵패를 받은 자는 관 ·민을 가리지 않고 전답
이라도 팔아서 바쳐야 했다. 만일 불응하면 서원으로 잡혀가서 공갈 ·
협박을 받고, 사형(私刑)을 당하였다. 이 불법 행위가 문제되어 흥선
대원군 이전에도 이 서원 및 일반 서원도 여러 번 단속하였다.
현재 복원하고 있는 우암 송시열 유적의 안내문은 다음과 같다.
“이 유적은 조선 성리학을 계승하고 완성한 우암 송시열(1607~1689)
의 애국사상과 중국 청나라의 무력에 굴하지 않는 민족자존 정신이 깃든
곳이다. 화양서원은 송시열이 숨어살았던 장소에 세워진 서원으로써 조선
시대 학자들의 모임 장소였으며, 만동묘는 중국 명나라 황제[신종, 의종]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옛터가 잘 남아 있다. 또한 주변에는 송시열의 묘소
와 신도비, 암서재, 읍궁암 외에 암서재 주변의 암벽에 충효절의, 배례부동
등이 새겨져 있어 반청애국사상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건립이후 조선조
말까지 성리학의 중심지였던 이 유적은 경술국치 후 일제에 의하여 철저하게
왜곡되고 파괴당하는 수난을 겪은 곳이다.”
화양서원 정묘비는 화양서원 건립취지와 향사하고 있는 송시열 선생을 추앙하는
뜻을 기록한 것으로 1716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조선말기에 서원이 헐리면서 이 비석도 땅속에 묻혔다가
광복이후 다시 세우고 1980년에 그옆에 한글로 된 해설비가 세워졌다.